지리적으로 경상북도의 중앙에 위치하며 중앙선 철도의 관통과 더불어 대구-안동간,
포항-영주간을 잇는 5번 국도와 28번 국도가 교통의 동맥을 이루고 있다.
중앙을 가로지르는 위천은 군위의 젖줄일 뿐 아니라, 농.공업용수 활용이 용이하여 대구의 위성도시로 성장할 수 있는 개발잠재력이 무한한 고장이다.
최근에는 농공단지 유치와 팔공산 순환도로 개통, 중앙고속도로 개통, 경북능금 종합 가공공장유치 등으로 농공병진하는 지역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면적은 614.16㎢, 인구는 24,105명(2013년 9월 기준)이며 1읍 7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군청은 군위군 군위읍 동부리에 위치하고 있다.
* 역사
삼한 - 진한의 여담국, 소동봉국 등 부족국가를 형성했다.
삼국 - 신라 초기에는 노동멱현 또는 여두멱현과 모혜현(현:효령), 부림현(현:부계),
귀산현(현:의홍)이 있었다.
통일신라 - 757년(경덕왕16) 전국에 9주를 설치하고 군.현의 명칭을 고칠때 적라현(적라산이 있었으므로)으로 개칭, 효령현(현:효령)과 함께 숭선군(현:선산)의 영현이 되었다.
고려 -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에 신검의 후백제군을 치기 위해 이 고장을 지날때 고려 군사의 위세가 당당하여, 이를 기념하기 위해 태조 왕건이 이름을
군위라 지었다 한다.
1081년(현종 9) 상주목에서 1143년(인종 21)에 다시 일선현(현:선산)에 환속하였고,
1314년(충숙왕 원년)에 효령부로 개칭했으며 1390년(공양왕 2) 남무를 두고 효령부를 군위현으로 통합했다.
부림현은 고려초에 부계현으로 고치고 상주목에 속했다가, 다시 일선군(현:선산)의
현으로 되었으며,1390년(공양왕 2)에 의흥군에 속했다.
귀산현은 고려초에 의흥군인데, 1018년(현종 9) 안동도호부에 속해 있다가 1390년
(공양왕 2)에 남무를 두고 부계현을 통합했다.
조선 - 1413년(태종 13)에는 군위현과 의흥군을 현으로 개칭 각각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5월26일 칙령 제98호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대구부의 군위군과의
흥군으로 승격되었으며, 1896년(고종 33) 8월 4일 칙령 제35호로 13도제 실시에 따라 경상북도의 군위군과 의흥군이 되었다.
근대 - 1914년 3월 1일 부령 제111호로 부.군.면의 통폐합에 따라 의흥군을 군위군에 병합, 8개면을 관할 할때 의성군 소야면(현:인곡, 양지, 낙전, 가암, 석산, 학암) 일부가 군위군 고로면에 편입되었다.
현대 - 1973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의성군 금성면 광현1, 2, 3동이 군위면에, 선산군 산동면 도산1, 2동이 소보면에 편입되어 8개면 177개동을 관할했다.
1979년 5월 1일 군위면이 군위읍으로 승격(1읍 7면).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부계면 고곡동, 매곡동이 효령면에, 산성면 원산동, 금양동이 의흥면에
편입되었다.
1988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산성면 화전동이 화전1, 2동으로 나뉘었으며
같은 해 5월 1일자로 동이리로 명칭 변경되었다.
1989년 1월 1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소보면 대흥1, 2리가 군위읍으로 편입되었다.
1991년 1월 1일 행정구역 조정에 따라 부계면 대율리가 대율1, 2리로 분리되어 1읍
7면 179리를 관할하게 되었다.
* 문화
민속 - 박시놀이
음력 정월 초 이틀 팔짱을 낀 동네 아이들이 골목 이곳 저곳에서 서로 밀며 큰 무리를 형성한다. 곧이어 '박시한다'는 함성을 외치며 집안에 있던 아이들이 하던 일을
팽개치고 골목으로 뛰쳐 나온다.
동네 아이들로만 이루어진 '애기박시'로 '박시놀이' 서막이 오르며, 온 동네의 열기는 한껏 고조되고 동(東), 서(西)부의 청장년들은 보름날이 되기만을 기다린다.
보름날 저녁에 초저녁부터 농악대는 농악을 올리며 '박시놀이'를 알리고 명주수건으로 상투를 동여맨 청장년들이 서로 어깨를 밀어 '박시놀이'는 시작된다.
이윽고 편이 갈라지면 지난 해 패한 팀이 공격을 시작한다. 이 때 팔을 풀거나 걷어찰 수 없는 것이 '박시놀이'의 불문율로 단지 밀어 젖히기만 해야한다. 공격패는 공격하기 전에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골았네 골았네 동(서)부동패 골았네" 라며 상대방을 조롱하는 말로 사기를 올린다. 사기가 충천하고 전운이 감돌면 공격이 시작되고 가장 힘이 센 '박수'들이 머리군이 되어 공격을 한다. 어깨와 어깨를 밀치기로
밀고 밀리는 대접전이 오랜 시간 계속된다. 주위의 노인과 부녀자들은 징을 울리고
북을 치며 싸움의 흥을 돋우는 일대 장관이 펼쳐진다. 결국 상대방의 박수들을 상대방 진지까지 밀고 가면이 놀이의 승부가 결정되고 이긴 팀은 농악을 울리며 개선하게 된다.
마을 전체의 승리를 위해 개인의 희생이 요구되는 '박시놀이' 의 기원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약 300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승리하면 그 해 풍년이 든다는 속신이 풍요를 바라는 농민의 순박하고 애절한 마음과 이어져 '박시놀이'
가 탄생한 것이다.
1944년 중단됐던 이 놀이는 1987년 10월 27일 군위고교 학생들에 의해 재현, 현재 군위중·고등학생들에 의해 맥을 잇고 있으며 매년 10월 군민축제 때 시연된다.
민속 - 지얘밟기
지얘밟기 놀이는 의흥면 읍내리에 전해 내려오는 부녀자들의 놀이로서, 원래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놀이였는데 의성을 거쳐 의흥지방으로 전해진 것이다.
기원은 고려 31대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난으로 개경이 함락되자 공민왕이 공주와
함께 안동지방까지 피난을 왔을 때 이 곳 부녀자들이 공주를 위로하기 위해 이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그 후 해마다 정월 보름날 밤에 부녀자들이 한곳에 모여 한줄로 늘어선 다음 허리를
구부리고 각기 뒷사람은 앞사람의 허리를 껴안고 한 소녀를 그 위에 올라서게 하여
양쪽에 한 사람씩 소녀의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밤늦도록 놀았다.
안동지방에서 이것을 놋자리밟기 또는 놋다리밟기라고 불렀으나, 의흥지방에서는 지얘밟기 또는 기애장놀이라고 불렀다. 지얘 또는 기애장은 기와의 사투리이므로 표준말로 하면 기와밟기가 되는 셈이다.
구부린 부녀자들의 등위를 한 사람 한 사람 밟고 가자니 꿈틀거리며 떨어질까 조심되는 꼴이 마치 기와지붕 위를 기와가 깨질세라 조심조심 걸어가는 것과 같아 '놋다리'보다 '기와'라는 사투리가 부드럽고 애교가 있어 여성다운 표현이다.
매년 군위군민축제때 의흥종합고교생에 의해 재현되고 있다.
* 유래
군위군은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 후백제군을 치기 위해 이 지역을
통과하였으며 그 당시 군사의 위세가 매우 당당하였다고 한다. 훗날 이를 기리기 위하여 군위라 명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군위의 상징
군목 - 느티나무 - 좋지 않은 토양조건에도 불구하고 잘 자라며 번식력이 강함을 나타냄
군조 - 왜가리 : 길조로서 온몸이 희며 군민의 풍요를 상징함
군화 - 개나리 : 화사하며 단결성과 통일성을 뜻하며 군민의 평온함을 상징함
* 역사를 빛낸 인물
1) 의병장 장사진(1572 ∼ 1592)
조선 선조때의 의병장. 관향은 인동. 효령면 병수리에서 삼형제 둘째로 태어났다. 교생으로 있을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복수군이라는 이름의 의병으로 인동지역에서 적을 무찌르며 군위를 방어하였다.
적이 복병을 배치하고 사진을 유인하매 이를 추격하다가 복병을 만나 분전 끝에 한 팔을
잃고 한 팔로 싸우다가 마침내 순국하였다. 순국후 선조께서 수군절도사의 벼슬을 내렸다.
2) 의병장 홍천뢰(1564 ∼ 1615)
자는 응시, 호는 송강으로 지금의 부계면 대율리에서 태어났다. 스물 한살때(선조 17년)
별시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선조 25년)으로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을때 의병을 일으켜 크고 많은 전과를 올렸다. 특히 영남좌우도의 길목인 영천성 탈환시 선봉장으로 활약했다.